소백산맥의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제법 웅장하면서도 아담하게 잘 어루만져진 양 봉우리의 얕트막한 구릉지대에 포근히 감싸여진 우리마을은 예로부터 우계이씨들만의 집성촌으로써 서로 형님아우,아제지간으로 그리고 당숙을 넘어 더 멀어져도 가까운 친족이요, 한편으론, 이웃사촌으로 오손도손 대대로 함께 어우러져, 지금껏 삶의 동반자로써 늘 희노애락을 같이 하며, 수백년간 30호가 넘는 집성촌락을 이루며 살고있다.
나의 어릴때 우계이씨에 대한 생각은 아버지, 할아버지로 부터 띄엄띄엄 들은 단편적인 내용의 지식과 주위 친척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은 것들을 합해봐야 남들이 좀 낮설어 하는 이씨듯이, 나도 우계이씨에 해하여 서툴게 아는 수준이, 남들과 다를바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경주,전주이씨는 알아주는 이씨인데,우계이씨 하면 주위에선,안다는건지,모른다는건지 반응이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애매한 반응만 되돌아 올 때 느끼는 묘한 뉘앙스에 화가나, 어설픈 피상적인 실력으로 설명을 해봐야 친구의 반응은 매한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그런 이씨도 다 있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무식의 소치로 인해, 이것저것 뒤적여 보지만,궁금증은 더해만 가고, 결국엔 단편적으로 알던것들이 서로 얼키고,설키어, 이젠 나름대로 우계이씨에 대하여 여느 대성인 이씨들 못지않은 강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비록 남들이 좀 뜨악하게 알지 모르지만, 조상님들이 부귀영화를 초개와 같이 여기시고,한점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살아오신 모습을 지금도 보는 듯 눈에 선함과 동시에 무한한 경외감 마저 들 지경입니다.
1집성촌
우계이씨는 태동기에 최충헌의 난으로,씨족의 존망이 달린 절제절명의 어려운 순간을 잘 견뎌내고,의연히 대대손손 이어오면서, 이제는 이씨들중에서도 고매한 명망으로 이름을 등재하며, 전국 여러곳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그 뿌리가 방방곡곡으로 뻗어나가 우계이씨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여기며, 여기 저기서 사회의 지줏돌로 번성하고 있다.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있는 대표적인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일원,황해도 일대,강원도 원성군 부론면일원, 경북 울진군 수산리,경북 달성군 성북면, 경북 안동군 녹전면 녹래리, 안동군 도산면일원, 경북 영주시 상망리,부석면 감곡리일원등등 여러곳이 있다
참고로 1985년 인구조사결과 남한내에 3400가구14,000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조사되었고,지금은 남한내에 20000명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우계이씨 화수회 추산)
2,우계이씨의 연원(본관및 시조의 유래)
우계(羽溪)는 강원도 강릉 남쪽에 위치했던 신라때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우곡현이었는데,통일신라의 경덕왕이 우계로 고쳤다. 그리고 현재는 강릉시 옥계면이다.
우계이씨(羽溪李氏)의 시조는 경주이씨 시조인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고려때 중서사인을 거쳐 좌복야를 지낸 이양식(李陽植)이다. 그의 아들 순우(純祐)는 예부상서, 한림학사를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경주에서 우계로 이거하였다. 그후 양식(陽植)의 5세손으로 예빈경을 지낸 구(球)에 이르러, 경주이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우계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경주이씨로 부터의 분적도를 참고로 알아보면
이알평(경주이씨 시조-경주이씨 1세))-이거명(중시조-시조로 부터 36세)- 충섬(44세:시중)-춘정(45세-부사)-현복(46세)-선용(47세-군윤)- 승고(48세-선용의 첫째아들),이양식(48세-선용의 둘째아들:우계이씨 시조,좌복야 할아버지) 경주이씨에서 분적한 이씨들은 우계이씨를 비롯해, 차성,합천,가평,아산,재령,원주,평창,흥양등이 있다
3)이구(5세)-고려 충렬왕때(1283년)원나라 과거에 18세로 합격,고려로 돌아와 중용되어 예빈경에 오름.
4)이녹후(6세)-고려 충숙왕때 문과 장원급제,대사헌,문화시중평장사,삼중대광(정1품) 에 올라 옥천부원군 작위를 받았다.
5)이 억(8세)-공민왕때 문과급제, 강계원수때 이성계 예하부대로 요동정벌에 출정하여, 위화도에서 요동땅에 선발대격으로 들어가, 요동군과 전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이성계로부터 금정아 무늬의 비단을 포상으로 받았다 공양왕4년(1392) 밀직부사(정3품)일때 이성계가 공양왕을 밀어내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공을 도평의사사로 삼았는데 "충신은 불사이군이거늘 어찌 내가 이씨의 신하가 되겠는가"하며 관직을 거절하고 소백산 순흥땅에 은거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여러차례 불렀지만, 고려의 망복지신을 자처하며 그 절개를 지키셨다. 전설에 의하면,이성계가 아홉고을을 식읍으로 주었으나 "고려의 유신으로 어찌 이씨의 녹을 받으라"며 아홉 고을에서 올라오는 세공이 따로 쌓여 아홉더미를 이루곤 했는데, 그 곡식을 쌓았던곳이, 지금의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로 조선말 기까지도 "순흥부구고"라고 한다. 그 쌓인 아홉더미의 곡식은 관아에서 빈민구 제용으로 나누어 주었다한다(영주영풍향토사지) 공은 "불천위"로봉해져영원히봉제했다한다 (불천위:공신은 4대봉사 로 끝나지 않고,영원히 봉사하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로 우리선조 중 불천 위는 원수공이 유일
6)이인숙(10세)-덕천군수
7)이수형(12세)-호는 도촌,음보로 벼슬에 나아가 평시서령시(종5품 문관), 단종이 수양대군 에 의해 폐위될때(1455년), 표연히 벼슬과 집과 친척들을 뒤로한채,지금의 봉 화군 도촌으로 낙향하여 94세의 연세로 세상을 뜰때까지 한평생 단종을 추모 하며,단 한번도 자기가 살던 공향 서울엔 가지 않았다고 한다.
1456년 단종이 월로 유배되자,원호,조려등과 치악산에 들어가 절의를 맹세하 고,함께 제명을 남긴후(치악산 제명록) 도촌에 은거하면서 집을 지울때 삼면 의 벽은막고 , 단종이 계신 영월쪽인 북쪽으로만 창을 두었으며 후세인 이광 정이 공북헌이란 현판을 달아드렸고,권두경은 천인실이라 이름지었다고 한 다 공은 21세에 도촌으로 낙향하여 94세에 돌아가시기까지 칠십수년을 오로 지 단종이 잠든 영월을 바라보면서 살았다고한다
세조 임금과는 어릴때부터 친한 사이라,세조가 식물과 전답을 내리고, 통훈대 부의 벼슬에 등용하려 했으나,절의로 모두 거절하였고,1477년(성종2) 직첩이 다시 내려졌으나,역시 받지 않았다 한다.
세조의 명으로 설치된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 동무에 생육신 모두가 배향되었 는데,공은 김시습 다음으로 둘째번에 봉안되어 지금까지 배향되고 있다고한다. 광해군때(1610)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공의 높은 절조와 학덕을 기려 도 촌에 도계서원을 짓고 이수형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사를 받들었다 한다
858년(철종9년) 경상도 암행어사 임응준의 상소로,좌승지에 증직되고,이후 고종때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유집으로는 "도촌선생실기"괴단감광록"이 전한다.
8)이득성(12세)-1451(문종때) 급제후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던 단종조때에 국사가 어지럽고 나라가 그릇됨을 깨닫고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삼척군 근덕면으로 낙향하여 우거하며 시문을 벗삼아 시름을 달래었다한다.
9)이지방(13세)-성종때 무과에 급제하여,동지돈녕부사,오위도총부 부총관(종2품)을 역임했다, 세칭 명장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누차에 걸처 호적을 토벌하였다고 묘지에 기록되어 있다, 종성과 회령부사를 거쳐 경상,함경,평안절도사를 지냈다
10)이 영(14세)-도촌공 수형의 장남인 홍천공 휘 대근의(홍천현감 지냄) 셋째아들로,조정에 서 절의의 후손임을 참작하여, 임금이 병조참판을 제수하고 불렸으나 공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도촌을 떠나 안동시 예안,녹전으로 이거하여 외부와 인연을 끊고, 조용히 숨어 수신제가하며 살았다고 한다.
11)이광식(14세)-1516년(중종때) 무과에 급제하여,종성부사,평안도 병마절도사등을 역임한후, 명종조에 병조참판,비변사당상,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에 부 임하였다 전라병마절도사때 왜적이 침입하여 변장들을 죽이고 10진이 함락되어, 군 무가위급할때 일을 잘 처리하고 병란을 평정하였고, 그후 경상도관찰사가 (1557년) 되었다 평소 집안이 엄숙하고 몸가짐이 소박했다고 전하며, 이감의 아 버지이기도 하다.
12)이 감(15세)-중종때(1543) 문과 을과에 급제후, 중종실록 편잔에 기주관으로 참여하였다. 명종 연간에 정언을 비롯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이언적을 탄핵하는 등,을사사화를 일으킨 국왕의 외삼촌 윤원형을 좇아,사림파를 탄핵하는데 참 여하였다. 그후 종성부사를 거쳐,1558년 성절사로 명나라를 다녀온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명종이 왕비의 외삼촌인 이량의 세력으로 윤원형을 견제할때, 이량편에서 윤 원형세력과 사림파와 대립하였다 그후,병조참판,도승지,형조참판을 거처 1563년에 대사헌에 올랐다 이어 이량이 기대승등과 함께,심의겸을 추출하려 하다가 기대항의 탄핵을 받아 몰락할때 ,6간으로 몰려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나.선 조때 사면령으로 고향으로 풀러났다 (조선의 정쟁2편 동인과서인편(신봉승지음,동방미디어펴냄)에서 소설로도 접 할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어보면 당쟁의 쟁정속에서 살아간 이감대감의 고뇌의 삶 을 조금이나마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3)이여빈(16세)-홍천공 대근의 증손으로,선조38년(1605)문과급제후 찰방을 받았고,성균관전 적(정6품) 재직시 어지러운 광해군의 조정에 벼슬할 뜻이 없었다 전은소(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할때,비록 친모지간은 아니지만 엄연한 모자 지간임으로 폐모의 부당성을 주장한 상소)란 상소문을 지어 올리고, 궐문밖 에서 복합한지 3일이 되었으나,임금의 뜻을 돌리지 못하매,탄식을 머금고,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로 퇴거하여, 시문으로 소일하니, 학덕이 매우 높았다 전한다,
남윤수의 한국의 화도사 연구편(1998년 간,역락펴냄)에 보면"위기지학(爲己之 學)에 마음을 두어, 그곳이 귀거래의 지향처로 삼았던, 이여빈은 온당치 못한 광해시절에 결국 은거하여,심성수양에 힘썼던 인물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14) 이명남(17세)-선조때(1605) 문과급제하여,우부승지, 예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의 벼 슬을 지냈다 이명남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허균 최후의 19일 12(김탁환지음,푸른 숲펴냄) 또는 조선시대 당쟁사 1(이성무지음,동방미디어펴냄,1999년간)
15)이복남(17세)-선조때(1588년) 무과에 급제하여,1592년 나주판관 재임시 임진왜란이 일어 나,왜적이 전주까지 올라오자, 김제군수 정담과 함께 웅치에서 왜적에 싸웠다. 이듬해 전라방어사,충청조방장,1594년 남원부사,전라도병마절도사,다음해 나 주목사을 역임후 다시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때 남원성에 서 십만(약6만) 왜병이 공격해 올때 남원성에는 양원의 명나라 병사 3 천명과 이복남의 조선병사 약 일천명 그리고 민간인등 총 1만명이 왜적에 게 맞서 4일간 항거하다가 끝내 남원성은 함락되고 ,공도 장렬한 최후를 맞 된다(향년 43세)
임란때 이복남장군과 아우인 덕남(금화현감),인남(남원우후) ,숙부이신 경 헌,승헌(두분은 신립장군 휘하 군관으로 탐금대에서 전사)등 다섯분이 모두 순사하니 ,일실오절이라 하여 추앙되었다 한다.
남원성 함락시 공의 3째 아들 경보가, 일본군 포로로 잡혀가 그곳에 정착하 였는데,그의 후손 이가정문 박사가 1982년 당시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뿌리 찾기를 부탁하여 마침내 이복남 장군의 후손이라는것이 밝혀저 화제가 되기 도 했다 이복남장군에 대해서는 "임진왜란은 우리가 이긴전쟁이었다- 정유재란의 재 조명편(양재숙,가람기획.2001년)"에서 장군의 나라사랑정신과 전투장면을 생하게 소설형식을 빌어 느낄수 있다,
16)이서우(19세)-현종때(1660) 문과 증광시에 합격하여,성균관사-대사간-대사헌-이조,호조,형 조,공조,4조참판-오위도총부 부총관-경기등 오도백-강릉,부령,동래부사를 역 임한곳에 인정비가 세워져있다 특히 시문과 서도에 유명하며 송파문집 20권이 있다 특히 백곡집서(이서우 저)가 현대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다,
17)이원철(27세, 1896_1962년)-1919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를 졸업하고,1926년 미시간주립대 학에서 "항성분광분석"이라는 논문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천문학자다. 1927년 귀국하여,연희전문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인 이 시기에 이박사의 존재는 한국의 지식인으로서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일본인들의 비 위가 상했을 것이다
1929년 발간된 과학전문지 과학은"이박사의 논문은 조선에서 유일한 과학논 문이며,조선 민족 전체를 해외에 알린 귀한 은혜"라고 극찬했다 한다 1938년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총독부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 당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 기상대의 귀중한 문건들을 일본으로 빼돌 린다는 사실을 미 군정장관 하지중장에게 항의한 것이 인연이 되어 1946년 관상대 초대대장으로 부임한후 15년간 근무했다.
1961년 5.16쿠데타로 관상대장직에서 물러난후,자녀가 없던 그는 전재산을 YMCA에 기증했다 현재 YMCA 강남지회에서는 이박사의 정신을 기린 "우남홀"이 남아 그 지를 기리고 있다고한다.
특히 그는 독수리자리에서 새로운 별을 발견하여 그 별의 이름을 "원철스타 (원철성)"라 명명하였다.
5,맺음말 여말 이억 ,조선초 도촌공 이수형,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조상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고, 부귀공명을 초개처럼 여기고 ,오로지 지조를 지키면서 고매한 한평생을 살아가신 선조들의 모습을 접하면서, 그분들의 인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성리학을 배경으로 한 시대 상황은 어버이가 둘일수 없듯이,충도 둘일수 없다며, 개인간의 친분에 앞선, 대의명분을 따름으로서, 개인의 명리에 연연해 하지 않은 모습이,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존경스러우며,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특히 도촌공께서는 약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한점 미련도 없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우리에게 옳고 그름이 뭔지를 일깨운, 올 곧은 선비의 표본으로 우리 우계 후손들의 가슴속에 아로새겨 질 것입니다. 우계이씨의 화목과 발전 그리고 조상의 유지를 받드는데 앞장서시는 우계이씨 중앙화수회의 번성과 안녕을 기원합니다, 2004,9,22 우계후인.
이홍선: 집성촌에 종가집이 있는 곳은 속에하지 않고 지손 만사는 곳이 집성촌인지? -[10/06]- ###: 삼성생명에서 제공하는 우계이씨 소개를 보시고 집성촌등은 조금더 보충해야 할것 같네요 -[10/12]- ###: 삼성생명에서 제공하는 우계이씨 소개를 보시고 집성촌등은 조금더 보충해야 할것 같네요 -[10/12]- 우계인: 궁금증 해소 차원에서 좋은 공부를 하셨네요.. -[09/19]-